[메디컬 프런티어] 대구 중앙이비인후과 박재율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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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최고수준 수술 못하면 언제든지 그만둔다"

"요즘은 만성 중이염이 많이 줄었습니다. 예전엔 방치하다가 악화되는 경우가 많았는데 소득수준이 높아지고 병원을 자주 찾다보니 그런 것 같습니다." 중앙이비인후과 박재율(50) 원장은 한 해에 중이염 수술만 400~600건, 편도선 수술은 200~250건씩 해낸다.

의사 개인의 수술 실적으로는 전국 최고 수준이다. 자신보다 수술을 잘하는 의사가 있다면 수술을 그만두겠다고 말하는 사람이다. 자만심이 아니다. 환자를 위해서 기꺼이 물러나겠다는 뜻이다. 이 때문에 그는 최고로 잘할 수 있는 것만 하겠다고 스스로 약속한다.

◆따뜻한 의사로 기억되고파

의과대학에 진학한 뒤 이비인후과 의사들이 머리에 쓰는 반사경이 멋져 보여서 전공으로 택했다는 박 원장.

나름대로 성공가도를 달렸다. 경북대 의과대학 6년 내내 장학금을 받았다. 31세에 대구가톨릭대병원 이비인후과 교수가 됐고, 33세에 전국 최연소로 대학병원 정교수가 됐다. 10년간 몸 담았던 교수직을 그만두고 개업한 이유를 물었다.

"결코 돈 때문은 아니었습니다. 제가 가장 잘 하는 것이 무엇이냐는 진지한 고민 때문이었죠." 2000년 의약분업 사태 당시 레지던트들이 집단 파업하는 탓에 그는 하루가 멀다고 야간 당직을 섰다. 10년 동안 앞만 보고 달려왔던 그는 회의가 들었다. "스스로에게 물었죠. 내가 가장 잘 하는게 뭘까? 교육, 연구, 진료 중에 저는 진료였습니다. 제가 가르친 제자를 최고로 만들 수 있느냐고 자문했더니 그렇지 않다는 답이 나왔죠. 그래서 그만뒀습니다."

의사로서 회한을 느낀 적도 많았다. 원하던 치료 효과를 거두지 못했을 때였다. "사람들을 보다 편안하게 만들기 위해 의사가 됐는데, 결과는 오히려 반대로 나올 때 숱한 밤을 새우며 고민했습니다." 레지던트 시절, 기관절제술 도중 환자가 뇌에 쇼크를 받는 일이 생겼다. 산소 공급이 중단된 탓이었다. 24시간 꼬박 곁에서 진료한 끝에 다행히 5일 만에 큰 후유증 없이 깨어났다.

아찔한 순간이었고, 동시에 그가 받은 충격도 컸다. 그래서 그는 어떤 의사로 기억되고프냐는 물음에 잠시도 주저하지 않고 "참 따뜻하고 좋은 의사"라고 답했다. 실력 있는 의사라는 평가가 좋지 않느냐는 기자의 물음에 그는 "실력은 기본"이라고 했다. 실력없이 환자를 대하는 것은 사기꾼이라고 거침없이 말했다. 부족한 의술로 환자를 치료해 오히려 못한 결과를 낳는다면 그것은 죄라고 했다.

◆지금도 그는 공부하는 의사

그는 공부하는 의사다. 책상 위에 최신 학회지가 가득 쌓여있고, 새로운 수술법이 있다면 어디든 마다않고 달려간다. 귀 뒷부분을 절제하지 않고 만성 중이염을 수술한 것도 박 원장이 처음이었다. 1995년부터 일 년간 미국에서 연수하던 시절, 귓속에 수술도구를 넣어 시술하는 것을 본 뒤 중이염 수술에도 응용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고, 대구가톨릭대병원으로 돌아와 실제 수술에 나섰다.

효과는 놀라웠다. 전신마취를 할 필요도 없었고, 회복도 훨씬 빨랐다. 수술시간이 줄어든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하지만 모든 의사들이 그런 수술법을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다. "제가 대학병원 과장이어서 가능했습니다. 선례를 따라갈 필요없이 제가 고안한 수술법을 현장에서 바로 적용할 수 있었죠. 아직 대학에선 도제식 수업이 이뤄지다보니 이전 수술법을 바꾸기가 쉽지 않습니다."

대학병원 교수직을 떠난 지 10년이 가까워 오지만 아직도 '스승의 날'이 되면 그때 배웠던 제자들이 찾아와 파티를 열어준다. 나름대로 이비인후과 분야에서 한자리씩 하고 있는 사람들이지만 "박 교수님께 배운 덕분"이라며 입을 모아 말할 정도다.

◆판에 박힌 치료법은 지양해야

그는 자칫 다른 의사들에게 욕을 먹을 수도 있다면서 조심스레 운을 뗐다. 삼출성 중이염 이야기다. '삼출성 중이염의 경우, 만약 중이강 내에 삼출액이 고인 것이 6주 이내이고 급성 염증 징후가 없는 경우에는 특별한 치료 없이 6주, 9주, 12주 후에 각각 삼출액을 확인해 보고, 만일 6주 이후에도 삼출액이 계속 남아 있는 경우에는 항생제를 10일 정도 투여한다.' 의학서적에도 이렇게 나와있다.

"하지만 아직 일부 의사들은 중이염이라면 무조건 항생제부터 투여합니다. 가만두어도 자연스레 낫는 수가 많은데 말입니다." 이 때문에 항생제를 열흘 이상 복용하고도 호전되지 않는 중이염 환자들은 박 원장을 찾아왔다가 약 하나 받지 못하고 돌아가는 경우가 많다. "약 먹지 말고 좀 더 지켜보자고 말합니다. 그런데 약을 안 먹고 일주일쯤 지나면 오히려 나아져 있습니다." 약을 먹어서 나은 것인지, 안 먹어서 나은 것인지 알 수 없다. 다만 박 원장은 항생제를 안 먹어도 나을 수 있다면 굳이 처방할 필요가 없다는 입장이다.

◆환자들의 기쁨이 활력소

포항에서 온 20세 청년을 그는 잊지 못한다. 진주종성 중이염 수술 이후 청력을 잃고, 사회생활도 포기한 채 우울증에 시달리던 청년. 그의 어머니는 실패해도 좋으니 아들이 다시 들을 수 있게 해달라고 애원했다. 청력재건은 1㎜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민감한 수술. "흔히 귀가 안 들려도 생활에 별 지장이 없다고 생각하는데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대화가 끊어지고 주변에서 고립되죠. 외로움 끝에 우울증을 겪게 됩니다. 시각장애인 박사는 많은데 농아 박사는 거의 없다는 걸 아십니까? 그만큼 청력은 중요합니다."

수술은 성공적이었다. 당초 한쪽 귀만 수술했는데 결과가 좋아서 다른 쪽도 수술했고 그 청년은 두 귀가 거의 정상으로 돌아왔다. 퇴원한 뒤 그 청년은 병원 로비에서 박 원장에게 큰절을 했다. 왜관에 사는 한 할아버지는 수십년간 보청기 신세를 지다가 박 원장에게 청력재건수술을 받고 다시 들을 수 있게 됐다. 얼마 전에는 서툰 글씨로 고마움을 담아 편지를 보내오기도 했다.

박 원장은 책상 서랍에서 꾸깃꾸깃 접힌 1만원 옛 지폐 두 장을 꺼내 보였다. 평생 어지럼증으로 시달리던 한 할머니가 박 원장에게 치료를 받고 난 뒤 고맙다며 건넨 돈. "식당을 하던 분이었는데 형편이 넉넉하지 않았습니다. 한사코 받지 않겠다고 뿌리치는데도 엘리베이터 밖으로 구겨진 돈을 던지며 가시더군요." 박 원장은 지금도 힘들 때면 구겨진 만원짜리를 보며 다시 용기를 낸다.

글·사진=김수용기자 ksy@msnet.co.kr

원본링크 http://news.imaeil.com/NewestAll/2010051007321870952